“ 나는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 한인청년 살인 사건 ”
SBS-TV 「뉴스 추적」공조
SBS-TV [뉴스 추적]
2009년 7월 1일 방영
나는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 한인청년 살인 사건
강효흔 공인탐정이 SBS-TV 의 [뉴스 추적] 제작진과 함께 2009년 4월 16일 시카고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추적했다.
** 억울하게 아들을 죽인 살인범 누명을 쓰고 구속됐던 고형석씨는 끈질긴 법정 투쟁끝에 1343일만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고 2012년 12월18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출소 후 소식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827079
전체보도 Link
1.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14546
2.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14550
3.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14558
4.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614572
의문점들
뉴스추적 제작진의 취재 과정에서 경찰 조사의 문제점도 속속 드러났다.
경찰은 기초적인 지문수사도는 물론, 주변 이웃들의 탐문 수사도 진행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현행범이 아닌 이상 살인 사건이 이렇게 빨리 종결될 수 없다고 말한다.
또 고형석 씨는 경찰이 시종일관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진술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범행을 목격했다며 자백을 유도했다고 토로했다. 당시 경찰서에 같이 연행된 아내 고은숙 씨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등 기초적인 미란다고지조차 듣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고형석 씨는 60억원을 보석금으로 내야 풀려날 수 있는 1급 살인범으로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SBS인터넷뉴스부)
나는 아들을 죽이지 않았다 - 한인청년 살인 사건
아메리칸 드림이 아메리칸 재앙이 되기까지… (뉴스추적 518회. 7월 1일 방송
전라남도 순천에서 교사 생활을 했던 청년. 역시 같은 동네에서 간호사였던 처녀. 둘은 한국에서 결혼했고 2살 난 딸을 데리고 1983년 미국 이민을 떠납니다. 미국에서는 아들도 얻었습니다. 아들 이름을 '고영보'라고 지었습니다. 남편은 세탁소를 운영했고 스쿨버스를 몰았습니다. 아내는 간호사 경험을 살려 노인요양원에서 일했습니다. 그러다 1985년, 미국 연방정부의 우체국 시험에 나란히 합격했습니다. 미국 정부의 공무원이 된 것입니다. 5만 불에 달하는 적지 않은 연봉. 가족은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삶의 안정을 찾았습니다. 자녀를 남달리 사랑했던 부부는 차를 끌고 미국 구석구석을 여행 다녔습니다. 가족의 아메리칸 드림이 재앙이 된 건 지난 4월. 이민 26년 만에 최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노스브룩의 비명 소리
4월 16일 새벽. 미국 시카고 노스브룩이라는 마을의 한 집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습니다. 22살 청년 고영보 군이 집 현관문 안쪽에 숨져 있는 것을 그의 어머니가 발견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911에 신고했고 곧 구급차와 경찰이 도착했습니다. 경찰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아들의 부모를 경찰서로 데려갔습니다. 날이 밝자 어머니는 풀려났지만, 아버지는 피의자가 됐습니다. 아들을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살해했다는 1급살인 혐의였습니다. 당시에는 아버지가 경찰서에서 한국말로 "모두 내 책임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경찰이 이걸 범행 자백으로 받아들였다는 말도 들렸습니다. SBS뉴스에도 보도됐습니다. 그때는 그냥 저런! 생각했는데, 일이 계속 꼬인다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어떻게 된 걸까요. 6월 18일 시카고로 떠났습니다.
숨진 고영보 군의 아버지 고형석 씨. 사건 발생 두 달이 넘도록 구치소에 갇혀 있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봤는데 절절했습니다. 감옥에서 한 끼 50센트(650원)짜리 식사를 하는데, 새벽 3시에 아침, 낮 1시에 점심, 오후 5시에 저녁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일주일에 1번 청소하고, 일주일에 1번 햇빛을 본다고 했습니다. 빛을 볼 수 있는 시간은 단 1시간입니다. 몸무게는 두 달 만에 20파운드(9kg)가 빠졌다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편지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뜻하지 않은 변고로 이렇게 감옥에 있는 것을 생각하면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너무나 억울하고 한바탕 소동을 부릴 만도 한 마음인데…" 옥중편지만 보면 그가 구금돼 있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경찰은 그를 왜 잡아갔나
노스브룩 경찰은 그를 왜 잡아넣은 걸까요. 경찰이 자세한 얘기를 한 적은 없습니다. 미국 언론에도 별 말 한 게 없습니다. 그냥 고형석 씨를 잡아간 뒤 그를 피의자로 만들고, 노스브룩 마을은 안전하다고 선포한 게 전부입니다. 경찰의 수사 내용은 법원 속기록(2009.4.17)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요약하면, 고형석 씨는 아들이 통금시간 11시가 넘어서 외출한 것에 대해 화가 나 있었다. 고 씨는 새벽 2시에 들어온 아들과 맞닥뜨렸고, 아들은 고 씨를 밀쳤다. 이에 아버지 고형석 씨는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 아들의 목에 휘둘렀다. 아버지는 또 아들을 뒤에서 붙잡고 칼로 아들의 목을 공격했다.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범죄입니다. 이런 비속범죄에 유죄 판결을 받으면 고형석 씨는 최장 60년 형에 처해집니다. 그의 나이를 감안하면 무기징역인 셈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사건을 날조했다"
가족의 얘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새벽, 집에 있었던 사람은 3명인데, 아버지 고형석 씨, 아내 고은숙 씨, 아들 고영보 군입니다. 고형석 씨는 구치소에, 고영보 군은 하늘나라에 있으므로, 아내 고은숙 씨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내의 얘기는 이렇습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 부부는 자정쯤 잠이 들었다. 새벽기도에 가려고 맞춰놓은 알람 소리에 깬 것이 새벽 3시45분이다. 2층 침실에서 나왔는데, 1층 주방과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갔더니 현관문 가는 길에 피가 낭자했다. 빨간 물감인 줄 알았을 정도다. 그런데 현관문 안쪽에 아들이 쓰러져 있었다. 놀라서 비명을 질렀고 남편은 비명 소리에 깨어 1층으로 뛰어내려왔다. 911에 신고했다. 경찰이 왔는데 남편을 잡아갔다. 그게 끝이었다. 구치소에서 직접 만난 고형석 씨의 진술도 아내와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경찰의 주장과 가족의 주장,
달라도 너무 다른 2개의 스토리입니다.
고형석 씨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족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갈 것입니다. 특히 아내의 애끊는 심정을 어떻게 헤아릴 수 있을까요. 아들을 잃은 슬픔에 남편 누명의 억울함까지. 노스브룩 경찰은 증거를 찾기 위해 집을 샅샅이 뒤진 뒤 '아니면 말고'일 테지만 가족은 환장할 일입니다. 범행을 저질렀다는 증거는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지만,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증거는 나오려야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방안에 CCTV를 달고 잠을 자지 않는 이상, 그렇게 그날 밤 계속 자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지 않는 이상, 고형석 씨가 잠에서 깨는 걸 제3자가 목격하지 않은 이상, 무죄의 증거란 없는 것입니다. 경찰-검찰이 유죄를 입증하는 데 실패하게 되는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운 감옥 생활은 가족이 오롯이 감당해야 합니다.
무죄의 물증이 없기에 사건에 의심스러운 점은 없는지 뜯어보기로 했습니다.
(1) 부검을 본 사람들
시신의 생김새가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시신은 그 생명을 잃은 뒤 모든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검을 본 사람들의 증언은 일치했습니다. 영보의 시신은 만신창이었는데,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6차례의 상처가 났고, 목 앞쪽에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특히 직접 사인이 된 목의 상처는 한 번의 공격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크기가 컸습니다. 심지어는 정수리에도 흉기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너무 잔인한 내용이어서 방송되지는 않았습니다만, 신체 뼈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부검 결과 확인됐다고 합니다. 이게 끝이 아닙니다. 이는 다 나갔고 입술도 터진 데다 잇몸도 성치 않았습니다. 얼굴 곳곳에는 주먹 혹은 강한 물건으로 구타한 멍이 남아 있었습니다. 법의학에 전문가가 아닌 여러분들 보시기에 이게 한 사람이 저지른 참사라고 생각하시나요.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체격 조건도 봐야겠지요. 아들은 올해 22살, 키 180cm, 몸무게는 90kg 정도입니다. 장정이 따로 없습니다. 아들에 견줘 아버지는 왜소했습니다. 올해 57살, 키는 170cm 안팎, 몸무게는 63kg밖에 안 됐습니다. 헤비급과 라이트급의 싸움이라는 얘기입니다. 노스브룩 경찰 얘기는, 이 라이트급 아버지가 헤비급 아들의 얼굴을 이가 부러지도록 구타하고, 흉기로 아들의 가슴과 목을 공격해 숨지게 했다는 것입니다. 총기도 아닌 흉기로 사람을 숨지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 사건에서도 흉기로 가슴을 6차례나 공격했지만 심장은 거의 다치지 않아 직접 사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라이트급 대여섯 명이 달려든다면 모를까. 한 사람의 범행이라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습니다.
영보의 시신에는 중요한 상처가 또 하나 있었습니다. 왼손바닥에 난 칼자국입니다. 누군가 흉기를 휘두를 때 당하지 않으려고 손으로 잡거나 막았다는 뜻입니다. 저항의 흔적입니다. 헤비급이 그렇게 저항했다면 라이트급도 타격을 받아야 정상입니다. 이것은 법의학까지 갈 필요도 없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몸은 만신창이인데 반해 살인자로 몰린 아버지의 몸은 깨끗했다는 게 가족의 주장입니다. 시신만 봐도 의혹투성이인지라 그 신중하다는 전문가들도 "이 사건은 말이 안 된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또, 우리가 과연 '목'을 공격한 비속범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아버지는 갱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 사건 현장의 흉기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흉기도 희한합니다. 노스브룩 경찰은 아버지가 주방에서 칼을 가져와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합니다. 가족들도 '주방에 있던 칼'인 줄 알았습니다. 아들이 숨진 충격에 경황이 없었고 칼날 길이와 손잡이 색깔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은 사건 사흘 뒤인 19일, 집에 돌아와서야 이상한 점을 깨닫습니다. 아들 옆에 떨어져 있던, 주방에서 쓰던 칼인 줄 알았던 흉기가, 주방 서랍 안에 그대로 보관돼 있던 것입니다. 즉 잘못 봤다는 얘기입니다. 사건 현장의 흉기는 주방에 있던 것과는 '다르게' 손잡이의 색깔이 더 밝았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발견돼 경찰이 가져간 흉기는 집에 있던 게 아니고, 누군가 가져와서 휘둘렀다는 게 가족의 주장입니다.
(3) 의문의 1시간 반
노스브룩 경찰은 아들 영보가 새벽 2시에 들어왔다고 주장했죠. 즉 범행 시각은 새벽 2시가 좀 넘어서일 것입니다. 어머니 은숙 씨가 일어난 시각은 새벽 3시45분. 911에 신고한 시각도 그 즈음입니다. 통화 기록이 남아 있으므로 경찰도 이 시각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 합니다. 경찰은 결국 고형석 씨가 아들을 살해한 뒤 '1시간 반'동안 도망가지 않고 집에 있다가 911에 신고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1시간 반 동안 아버지가 집안에서 증거를 없애느라 시간을 보냈구나, 그러고 나서 자고 있었다고 거짓말 하는구나, 이렇게 의심하기 시작하면 얼마든지 경찰의 스토리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제 경찰이 고형석 씨의 집에서 뭘 수사했는지 따져볼 차례입니다.
(1) 증거 인멸의 증거
노스브룩 경찰은 집안에서 뭘 했을까요. 집안 구석구석에는 보라색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다. 핏자국을 검사하는 시약입니다. 경찰은 2층에 있는 부부 침실에 딸린 화장실, 2층 복도의 화장실, 지하실의 화장실, 이렇게 화장실 3곳의 세면대와 욕조를 집중 조사했습니다. 지하실에 있는 세탁기와 락스 통에도 혈흔 검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집안 수사로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노스브룩 경찰은 (알 수 없는 이유에서) 아버지를 범인으로 단정했고, 그가 '의문의 1시간 반' 동안 증거를 인멸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경찰은 고형석 씨의 옷이나 몸에 묻었을 아들의 혈흔을 그가 물로 씻었다고 추정하고, 집에서 물이 나오는 모든 곳에서 혈흔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노스브룩 경찰이, 바깥에서 침입한 제3자가 범인이라고 판단했다면, 범인이 부부가 자던 침실의 화장실까지 들어와 혈흔을 씻었을까요? 경찰이 거기서 혈흔 검사를 했을까요? 결국 경찰은 '아버지=살인범' 공식을 세워놓고 증거 인멸의 증거를 찾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수사라도 제대로 했으면 말을 안 합니다.
(2) 의문의 콜라캔 2개
노스브룩 경찰은 숨진 영보의 방에도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변사자가 마지막까지 있었던 방이고, 그날 밤 누군가 같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방에서 물이 나오지 않으니 경찰은 이 방을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영보의 책상 위에는 콜라캔 2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누군가 따 놓았고, 2개 모두 다 마시진 않은 상태였습니다. 이걸 보면 제3자가 방에 같이 있지 않았냐는 게 가족의 추측입니다. 이 추측이 맞는지 틀린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범인 잡는 경찰은 이 추측을 검증했어야 합니다. 지문 감식 했어야 하고, 침이 묻어 있지 않은지 확인했어야 합니다. 이것도 안 했습니다. 콜라캔 2개는 사건 발생 2달이 넘도록 아직도 영보의 방에 그대로 있습니다.
경찰이 안 한 건 또 있습니다.
(3) 영보의 휴대전화
누군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궁금한 것. 마지막에 만나거나 통화한 사람이 대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변사 사건에서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조회하는 건 그래서입니다. 형사 아니라도 이 정도는 다 압니다. 그런데 노스브룩 경찰은 이것도 안 했습니다. 통화기록을 알아본 건 영보의 누나 고수란 씨입니다. 영보의 휴대전화 명의가 누나로 돼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경찰 수사한 게 아주 황당합니다. 영보는 사건 당일 자정을 조금 넘겨서 친구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것으로, 경찰이 아닌 누나가 확인했습니다. 통화기록에 관심도 없는 경찰은 그 친구를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통화기록은 '아버지=살인범' 공식과 관련이 없었으니까요.
이렇게 엉망 수사를 했는데, 아버지였던 참고인을 어떻게 피의자로 만들었을까요.
(4) 아버지가 범행을 자백했다?
해답은 역시 법원 속기록에 나와 있습니다. 노스브룩 경찰은 그가 처음에 거짓말을 했다는 걸 인정하고 사건 일체를 자백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영보가 통금시간을 어기고 새벽 2시에 귀가했고, 아들이 아버지를 밀쳤으며, 아버지가 주방에서 흉기를 가져와 범행했다는 것을, 아버지가 모두 불었다는 것입니다. 자백을 한 장소는 사건 현장이 아니라 노스브룩 경찰서에서입니다. 경찰은 또 자백 진술을 동영상으로 찍었다고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유죄 판결을 받는 피의자의 4분의 3이 이렇게 자백만으로 걸려듭니다. 우리는 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한 것인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일단 통역 문제. 당시 고 씨 부부가 경찰서로 연행된 시각은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입니다. 그 새벽에 전문 통역이 있을 리가 있나요. 다른 동네의 미국 교포 경찰관이 통역으로 왔다고 합니다. 이 통역이 남편과 아내를 모두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부부는 하나같이 통역의 한국말 실력이 형편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떠듬떠듬 한국말. 무슨 말을 해도 잘 못 알아들었다고 했습니다. 경찰이 찍었다는 조사 동영상이 지난주 법정에 제출됐고, 이걸 가족이 확인해봤더니, 고형석 씨는 결국 한국말이 아닌 어설픈 영어로 대부분의 조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아들을 잃어 정신없는 만큼 영어도 정신없었다고 합니다. 통역 경찰관은 심지어 아내 고은숙 씨에게 "한국말을 잘 못 알아들어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뭐 이런 조사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노스브룩 경찰은 또 부부를 비열하고 졸렬하게 조사했다는 게 가족 주장입니다. 고형석 씨에게는 "아내가 당신의 범행을 목격했다고 말했다"며 을러댔고, 아내한테 가서는 "남편이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며 진술을 압박했다는 것입니다. 치사한 거짓말에 유도심문까지 한 게 사실이라면, 설령 자백을 했다 하더라도 법정 증거로 채택돼서는 안 됩니다. 경찰도 이걸 알고 고형석 씨에게 협박적인 말을 더했다고 합니다. 법정 가서 정신이 혼미해서 한 말이라거나, 몸이 아파서 한 말이라고 하면 안 된다, 고 노스브룩 경찰관이 말했다는 겁니다. 고형석 씨는 아들을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은 데다, 자신을 변호해야 할 2중의 곤경에 처한 것입니다. 이렇게,
2중의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경찰이 반드시 해줘야 하는 게 미란다고지입니다.
(5) 변호사도 없었다
노스브룩 경찰이 뭐, 그들 나름의 판단으로 아버지에게 살인 혐의가 있다고 판단할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판단이 늘 완벽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당신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고, 당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는 말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경찰이 피의자에게 이 얘기를 안 해주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수 없습니다. 법원 속기록을 보면, 경찰은 고형석 씨에게 미란다고지를 한 후 진술을 녹화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고형석 씨는 "그런 얘기 들은 적 없다"고 말합니다. 아내 고은숙 씨도 조사 받기 전 변호사 얘기는 못 들었다고 했습니다. 노스브룩 경찰이 영어로 후다닥 말해버리면 못 들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조사에 참여한 어설픈 통역도 변호사의 '변'자 한번 안 꺼냈다고 합니다.
노스브룩 경찰이 이렇게 수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사흘입니다. 수사한 게 별로 없으니까 당연합니다. 사건이 발생하고, 부부를 잡아가고, 아버지를 체포하고, 집안을 수사한 뒤 모든 걸 끝내버렸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 강남 격인, 노스브룩 마을은 안전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누군가 숨지면, 최소한 탐문 수사를 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용의자를 추리하고, 알리바이를 깨야 합니다. 며칠, 몇 주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음 용의자를 체포하고 증거를 들이대 꼼짝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현행범이 아닌 이상 이런 엉망 저질 수사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백인이면 함부로 이렇게 못 합니다. 명백한 인종차별입니다. 고형석 씨의 주장에 대해 노스브룩 경찰은 인터뷰를 거절했습니다. 지난주 법원에 제출된 동영상이 자백의 진실을 말해줄 것입니다.
교민사회의 도움의 손길들
고형석 씨는 법원에서 보석금 60억 원을 선고 받고 쿡 카운티 구치소에 수감돼 있습니다. 보석금의 10%인 6억 원을 내야 불구속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가족은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살던 집을 내놨지만 팔릴 기미는 없습니다. 시카고 교민들은 고형석 씨를 돕기 위한 자선음악회도 열었습니다. 두 차례 음악회에서 부족하나마 8백만 원을 모았습니다. 이례적으로 높은 보석금을 낮춰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도 쌓이고 있습니다. 한국인 미국인 가릴 것 없이 3천여 명이 서명했습니다. 교민들은 미국시민권을 갖고 있든 없든, 고형석 씨 가족의 외로운 싸움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카고 총영사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시카고 총영사관은 고형석 씨 부부가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다"는 정도의 외교적 표현도 힘드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위험한 발상'이라고 했습니다. 글쎄요. 한국 국적을 취득한 미국인이 국내에서 비속 살인을 저지른 혐의로 수감되고, 한국 경찰의 불공정한 수사가 문제됐다면, 그때도 미국이 입을 닫고 있었을까요. 판단하기 힘듭니다. 방송됐다시피, 대통령이 미국시민권을 가진 재미교포를 모아놓고 연설할 때의 교포는 뭐고, 억울함을 호소할 때의 교포는 무엇인지. 그 둘이 서로 다른 교포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끝으로, 대한민국 경찰이 이렇게 수사했다면,
언론에 의해, 네티즌 수사대에 의해 흠씬 두들겨 맞았을 것입니다.
안타깝게 숨진 고영보 군의 명복을 빕니다.
아울러 경찰의 재수사를 통해 하루 빨리 사건이 진실이 밝혀지고, 가족들의 깊은 상처가 아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박세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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